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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애국지사 고향, 금성면 대곡2리 손오실마을

기사승인 2021.05.10  10: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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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뚤레뚤레 동네한바퀴(32)

마을전경
400년이 넘었지만 아주 건강한 마을 당산나무

요즘 농번기라 고양이 손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쁜 시기이다. 
대곡리 신강호 이장님께 전화 드렸다. 
“이장님, 마을 취재 한 번 가려고 하는데 언제 1~2시간 정도 시간 있으신지요?” 
“네 시간은 괜찮은데 우리 마을에 특별한 것이 없는데요.” 
“자랑거리 없어도 돼요. 담양에 있는 마을이면 어느 마을이든 가서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동네 분들 사시는 모습도 보고 그분들과 이야기도 좀 나누면서 사진 몇 장 찍으면 되는데요.” 다행히 이장님께서 미리 고추심기를 마쳐서 시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대곡리를 취재할 수 있었다.  

이장님께서 마을에 자랑거리가 없다고 하시더니, 마을 입구에 고하 송진우 선생 고택임을 알려주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260호’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장님과 함께 송진우 선생이 나고 자라신 고택을 둘러보니 건물이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옆에 선생의 유품전시와 역사적인 업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근대역사문화교육관’은 휴관이라 외양만 보고 온 것이 몹시도 아쉽다. 

송진우선생 생가
송진우 선생 기념관(근대역사문화교육관)

 

고하 송진우 선생은 1906년 17세에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7년 10월에는 김성수와 함께 새 학문을 연마, 기울어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1915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당시 민족신문이었던 동아일보에서 주필·고문·사장 등으로 재임하면서 30년 인연을 맺었다.
1918년에는 김성수·현상윤·최린·최남선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 방법을 모색, 3·1운동이 일어나게 했다는 연유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 측으로부터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신 분이다. 물론 송진우 선생 본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되었다. 

이장님께서 송진우 선생 고택 앞에 위치한, 여러 그루 대나무 분재를 만드신 분 댁으로 안내해주신 덕분에 그분의 작품현장을 둘러보는 기쁨을 가졌다. 이분은 처가와 친가 부모님을 모시면서 15년 전부터 ‘대나무 표준화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성함을 밝히기도 꺼리실 정도로 혼자의 힘으로 조용히 연구해서 지금은 많은 기술을 축적했다. 
“오랫동안 대나무를 연구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나무가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은 동네분들이 좋아서 집을 지어 귀촌했습니다. 제 연구가 담양을 관광명소로 만드는데 기여하면 좋겠고, 동네 어르신들의 용돈벌이가 좀 되면 좋겠습니다.” 
“이 마을을 대나무 연구하는 장소로만 이용하시다가 귀촌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있으세요?”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이 나고 자라신 고택이 있어 품위가 있지요. 후손들이 빛을 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또 마을분들이 온정적이며 서로 돕고 배려하는 문화가 있어서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장님께서 본인 트럭으로 다니면서 마을분들의 애로사항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시죠 ”

대나무 표준화 연구가 선생님과 인사하고 골목을 내려오는데 소리가 들렸다. 대문부터 옛날 느낌이 살아있어 나를 끌어당겼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네 어서 오세요.” 
집주인 내외분이 불청객을 맞아 주셨는데, 비교적 넓은 뒷 뜰에 수령이 상당한 매실, 오디, 호두나무, 그리고 앞뜰의 덩굴장미 포기가 제법 커진 수선화 등이 자리 잡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텃밭농사 규모가 상당하네요.”
“네 초등학교까지 이곳에서 다녔어요. 제가 장남이라 주 2~3회 와서 텃밭 농사와 집 관리를 하고 있어요.”
“보통은 부인들이 시골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어떻게 오시게 되었어요?”
“제가 텃밭 일을 좋아해요.” 오순도순 상의하면서 풀 뽑고 모종을 심는 모습이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옛날 송진우 선생께서 거닐었던 ‘미니죽녹원’이라고 표시된 마을 뒤 언덕에 올라갔다. 약간의 경사가 있어 걷기에 힘들지 않았고, 상당히 넓고 깊은 대숲이었다. 원시림 같은 대숲 사이로 넓은 길을 내고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쉬엄쉬엄 대숲 길을 걷고 ‘근대역사교육관’을 관람한다면 하루 나들이는 될 듯 하다.

마을옆 미니죽녹원(걷고싶은 대숲 길)

마을을 다 돌고 나오는 길에 다정히 옥수수와 콩을 심고 있는 모녀를 만났다.(민경 엄마 댁 모녀) 서울에서 공부까지 하고 농촌에 시집간다고 어머니께서 많이 서운해 하셨다고 한다. 
큰딸 낳았을 때 몸조리해 주시러 오셔서야 딸과 말문을 트셨을 정도로 서운해 하셔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신다. 
“남편분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나요?” 
“서울에서 말 잘하고 잇속에 빠른 사람들을 보다가 말주변이 없는 남편을 보자 정말로 순박해 보였어요.” 
딸에게도 맘 편히 투덜거리며 콩 옥수수를 심는 그 모습이 정말 부러워 돌아가신 나의 엄마가 그리워졌다./ 양홍숙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돌담
오래보존되면 좋을것 같은 대문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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