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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담양의 역사인물(32)창주 나무송

기사승인 2021.07.26  09: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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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역사인물(32)/창주 나무송(羅茂松, 1577~1653) 

물염정

나무송은 담양의 대곡리 구화동(현.대덕면 장산리)에서 출생했으며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이다. 
참판 나빈의 후손으로 조부는 나율이고, 아버지는 장악원 정을 지낸 나덕용이며 어머니는 홍주 송씨 송정순의 딸이다. 동복 부사를 지낸 외할아버지 송정순으로 부터 화순 동복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을 물려받았다.

1606년(선조39) 사마시, 1615년(광해군7)에 알성 문과에 합격했으며 거산찰방에 제수되었다. 당시 이항복이 광해군 폐모사건으로 북청에 유배 생활을 할 때 친밀하게 종유하다가 그가 귀양소에서 별세하자 제문을 지어 영혼을 위안하는 제사를 지냈다. 또한 퇴계 선생의 묘에 제문을 지어 제사함으로써 현인을 존경하고 숭모했다.
나무송은 또, 병자호란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파천할 때 예조 정랑으로 임금의 대가를 호종하여 시위하였으며, 속히 돌아가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전교에 의해 적의 포위망을 뚫고 임지에 들어가려고 할 때 적이 이미 도성을 점령하고 도로가 막힌지라 임지에 가지 못하고 동지 이명익을 만나 순국을 언약하고, 양주에 이르러 상주 목사 이유성과 회암사에서 서로 만나 눈물을 흘리며 순국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중 강화 소식을 듣고 물러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화순 동복의 물염정에 내려가 시인 묵객과 더불어 소일했다. 문집으로는 ‘창주 선생 유고(滄洲先生遺稿)’가 있으며 묘소는 담양 금성면 평신기 마을에 있고 나주 송재사(松齋祠)에 배향됐다.

한편, 국자학 정(正)을 지내고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 광해군으로부터 관작을 삭탈당하고 인조반정 후 예조 참의에 추증된 구화 나무춘(羅茂春, 1580-1619)은 그의 동생이다.
아울러 담양군청 나규채 비서실장 가문이 나무송의 직계 후손이다./담양뉴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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