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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기획연재Ⅴ(소설)/추월산 길라잡이(제14화)

기사승인 2021.08.02  09: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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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오 작가

■ 1594년 3월
<14화>

  “이렇게 일찍 어인 일이십니까?”
  능주 말에 서둘러 소세를 하고, 의복을 갈아입은 덕령이가 마당으로 나와 황송한 태도로 담양 부사를 맞았다.
  “이게 어제 말씀드린 생향입니다. 설마 어제 약조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담양 부사가 안장에 걸어놓은 보자기를 내려 덕령이에게 흔들어 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덕령이를 못 믿겠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남아 일언은 중천금인데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미덥지 않아서 이렇게 서둘러 오신 겝니까?”
  덕령이가 약간 뾰루퉁한 표정으로 담양 부사를 보았다. 그런 일로 오셨다면 불쾌하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나리를 못 믿어서 식전부터 서두른 게 아닙디다.”
  “그러믄요?”
  “떡배 부모님이 한 시라도 빨리 풀려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젯밤에라도 생향을 갖고 오고 싶었으나, 때마침 손님이 찾아온 바람에 날이 밝아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어서 떡배에게 전해주고, 달려가 부모님을 구하라고 하십시오.”
  
 담양 부사가 노란 비단으로 묶은 보자기를 덕령이에게 건넸다. 
덕령이는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보따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코 가까이 가져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과연 신령스러운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잠시 후 덕령이는 천천히 보자기를 풀었다. 달걀만 한 생향을 들고 향훈을 맡고, 빙 돌려가며 살폈다. 그러는 동안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담양 부사가 가져온 생향은 능주가 이대록 대감에게 건넸던 것보다 조금 커 보였다. 능주가 주웠던 생향은 탱자 크기였으니까.

  덕령이는 생향을 다시 비단 보자기로 쌓았다. 담양 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먹을 갈아 글을 썼다.
  “이 서찰을 자네에게 전하거라.”
  덕령이가 말한 자네는 부인이었다. 
나리들이 부인을 자네라고 높여 부르는 걸 자주 들었다. 능주가 서찰을 받아들자, 덕령이는 보자기를 떡배에게 건넸다. 
부모님이 한 시라도 빨리 풀려날 수 있게 지체 없이 달려가라고 타일렀다. 생향을 분실할 수가 있으니, 사람 많은 길은 피하고, 여각에서 자는 것도 피하고, 옷 속 허리춤에다 꼭 매라고 했다. 떡배는 덕령이가 시킨 대로 저고리를 벗어 보자기를 야무지게 허리춤에 맸다. 떡배가 허리를 굽혀 감읍해 하자, 빨리 가라고 떡배 등을 떠밀었다. 떡배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혀 절하고서 여막을 나왔다.
  
 능주는 말없이 앞장서서 산자락 길을 따라 바삐 내려갔다. 떡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으니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하지 않았다. 떡배와 대화를 하다가는 지금 이 북받치는 감정에 금이 갈 것만 같았다. 능주는 담양 부사의 언행에 깊이 경탄하고 있었다. 범부라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일을 마치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는 배포에 감탄했다. 떡배 부모님을 생각해 눈을 뜨자마자 말을 타고, 혼자 여막을 찾은 담양 부사의 인간애에 마음이 울컥, 했다. 모처럼 고귀한 감정에 취해 있는데 떡배와 이야기하느라 깨고 싶지 않았다. 떡배를 힐끗 보니, 눈시울이 축축해 보였다. 풀잎을 적신 아침이슬 같은 게 얼핏 얼핏 보였다.
  “기분이 어짠가?”
  한참 이어진 침묵을 능주가 깼다.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습니다. 행님.”
  “나도 치솟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디, 동상은 오죽하겄는가?”
  “어제 두 분이 약조를 했어도,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더. 사실 생향을 내주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더. 그 귀한 생향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내준다는 게 말이 그렇지,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꺼. 기대를 말자 하면서도, 잠이 오지 않데예. 얼마나 기대가 컸는지 꿈에서도 나오는 거라예.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꿈에서는, 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인교? 그칸데 이렇게 얻었으니 얼마나 벅차겠습니꺼? 마,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더.”
  
 떡배 목소리에 물기가 촉촉하게 묻어 있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묵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능주는 순간, 뜨끔했다. 떡배와 여막으로 오면서 덕령이를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었다.
  “동상 사정이 하도 딱해서 나리님께 부탁할라고 여막으로 데꼬가긴 했는디, 감시로 내내 갈팔질팡 했당께. 효심이 지극해 동상이 처한 곤경을 나 몰라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워낙 귀한 사향이라 누가 선뜻 내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제.”
  “나도 그랬다 아입니꺼? 사나이들의 약조라 해도 지키기 힐들 거라고 생각했슴니더. 생향이 어디 그렇게 구하기 쉬운 약재입니꺼? 의병으로 간다는 기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사안입니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창검이나 죽창으로 대적해야 하는데 어디 그기 쉬운 일입니꺼? 참전이 곧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입니꺼? 당장의 기백에 약조를 했지만, 아침이 되면 마, 없던 일로 하자고 하실 줄 알았습니더.”
  떡배 얼굴에는 여전히 경탄이 가시지 않았음이 역력했다.
  “어떻게 나리의 은혜에 보답을 해야 쓰겄는지 모르겠당께.”
  능주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뭐든 돕고 싶은데, 내가 할 만한 것이 있능교?”
  떡배가 고개를 돌려 의지에 찬 눈으로 능주를 보았다.
  “그라제.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제. 가만있자. ……도와줄 게 있기는 한디…….”
  능주가 말끝을 흐렸다.
  “제가 도울 게 있다고예? 마, 뭐든 말 하이소. 뭔들 못 하겠습니꺼?” 
  떡배가 소리를 높였다. 도움을 받았으니 어떻게든 갚겠다는 생각이 담긴 듯했다. 
   “위험한 일이라 말을 꺼내기가 영판…….”
  능주가 또 말끝을 흐렸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그렇습니꺼? 형한테는 위험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닐지도 모른다 아입니꺼? 형보다 훨 젊다 아입니꺼? 일단 말씀이나 해 보이소!”
  떡배가 말과 표정으로 재우쳤다. 
  “아녀, 아녀. 그냥 다른 사람 알아볼 텨. 동상이 부산까지 갖다 올라먼 시간도 걸릴 테고.”
  “일단 들어나 보입시더. 무엇이든 도와드려야 내도 마음이 편할 거 아입니꺼? 평생 은혜를 갚지 않은 배은망덕한 놈으로 살아야 되겄습니꺼?”
  
 떡배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능주를 채근했다. 능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산자락 길을 따라 내려갔다. 떡배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자기도 그런 은혜를 입었다면 어떻게든 갚으려고 머리악을 쓸 것이다. 능주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일은 꼭 떡배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한 일이라 누가 선뜻 나서 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능주는 그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다. 자칫 하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부탁할 수가 없었다. 떡배가 귀한 생향에 몸 둘 바 몰라 하는 걸 보고, 얼핏 스친 생각이지만 참으로 꺼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떡배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통에 말이나 해보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나리님의 많은 후손을 위해 석청을 따러 다닌다고 했잖여?”
  “그랬지예. 근데예?”
  “추월산 암벽에 석청이 있는디, 워낙 위험한 곳에 있당께. 밧줄도 긴 것이 필요하고, 칡넝쿨을 새끼처럼 꼬아갖고, 타고 내려가야 딸 수 있어. 너무 위험한디라 같이 따자고 누구한테도 말을 못 했당께.”
  “애오라지 그것 때문입니꺼? 그런 거라면 마,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산 타고 바위 타는 건 제 전문 아입니꺼? 제가 예? 부모님만 빼내고 바로 올 테니, 그때 함께 가입시더!”
  떡배가 호기롭게 말했다. 생향을 얻은 탓에 나온 입찬말 같지는 않았다. 능주는 떡배의 호언장담에 말을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떡배가 부산에서 언제 올지 모르고, 설령 오지 않을지라도 말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머지않아 질 좋은 석청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능주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능주는 자기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온 세상이 황금물결이었다. 길섶의 풀들이 능주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아니면, 생향의 향기에 매혹되어 활짝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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