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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지역밀착형 기사/귀농일기(38)

기사승인 2021.09.14  11: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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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인 박판식 님의 ‘남편의 꿈과 소일거리를 찾아’

귀농인 박판식 님

 

 내가 귀농한 것은 남편의 꿈 때문이었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마음속 깊이 꿈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꿈은 바로 언젠가는 사과농장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간직할 수 있다. 나도 가슴 깊은 곳에 꿈을 간직한 적도 많았다. 시시때때로 바뀌어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내 꿈이 자주 바뀌었듯 남편의 꿈도 꾸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왜 사과농장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나처럼 꿈이 바뀌거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남편의 정년퇴직이 점점 가까워지자 남편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나왔다. 
퇴직하면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간직했던 꿈을 실현시켜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그때부터 길을 찾기 시작했다. 퇴직을 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체력이 충분하기에 사과농장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연고지에서 방법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처럼 나도 연고지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남편은 고흥이, 나는 거창이 고향이라 고흥과 거창 일대를 먼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연고지가 없는 담양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엄밀히 말해 담양에 아무 연고가 없다는 말은 잘못이다. 남편 여동생들이 담양으로 시집가 복숭아와 단감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복숭아와 단감은 남편이 원한 작물이 아니었으나 여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 과감히 담양으로 결정했다. 

박판식 귀농인의 사과농장

 내가 먼저 담양으로 내려왔다. 
남편이 퇴직하기 전에 자리를 잡고 싶어서였다. 땅을 알아보고, 남편이 꿈꿨던 사과나무를 심었다. 500평에 120주. 식재 후 3년 이상이 지나야 사과가 열릴 것이기에 그 기간 동안 내가 관리한다는 야심찬 생각이었다. 시골 출신이라 농사를 만만하게 본 것이었다. 말년이라고 놀 수만 없으니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것도 좋아 보였다. 집은 나중에 지을 생각에 컨테이너에서 살기로 했다. 시누이들이 계시기에 큰 어려움 없이 농사지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도 순진하고, 현실을 모르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평수는 넓지 않은데도 일이 끝이 없었다. 풀을 뽑고 돌아서면 풀이고, 아침 먹고 일하다 허리 좀 펼라 치면 점심시간이었다. 하루 일과가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사과 농사를 지어본 경험도 없고, 물어볼 것도 없으니 아득했다. 
장성에서는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아 물어보기 쉽겠지만 담양은 사과 농가가 별로 없었다. 우리 농장 직경 수 킬로미터 이내에 사과 농장을 하는 분이 없었으니 나무에 이상이 생기면 눈앞이 캄캄했다. 농약상에 물어보고 알음알음 물어 해결하곤 했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었지만 소득은 없고, 돈 들어갈 곳은 많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정보에도 둔했다. 농업기술센터나 면사무소 같은 기관을 방문하여 가능 지원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얼핏 지원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다 빚이라는 생각에 등한시  하기도 했다. 덕을 보려 하기보다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한다는 성격이 작용한 탓도 있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 길게 잡아 4년 이면 컨테이너 생활을 청산할 거라 예상했는데 거의 7년이나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수확한 사과 선별작업

 또 한 가지 어려움은 자연재해였다. 노지 작물은 자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이 한 번 앙탈을 부리면 그해 농사는 망칠 수밖에 없다. 냉해 같은 경우가 그렇다. 피해보상 제도가 있다고 해도 언제 보상이 이루어질지 모른다. 봄에 입은 피해 보상이 여름이 지날 때까지 미뤄지기도 한다. 그러니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장마가 길어진다거나, 우박이 내리고, 뜻하지 않은 추위가 닥치면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농사는 이래저래 힘든 직업이라는 걸 뼛속 깊이 느꼈다.
   
 남편의 꿈 때문에, 말년의 소일거리 때문에 시작한 사과농장.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귀농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외지인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정다운 이웃이 생겼고, 고향의 향이 묻어나는 상큼한 공기, 안구 정화가 저절로 될 것 같은 사방의 풍경들. 그런 이웃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간다는 것이 좋다.
 내 사과를 매년 찾아주신 단골이 생긴 것도 뿌듯하다. 소일거리 삼아서 한다는 생각에 규모가 작은 농장이라 공판장에 내다 팔기도 그렇고, 로컬푸드에 납품하기도 애매했다. 지인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었는데 맛을 보고는 매년 주문을 하시고, 다른 분에게 소개를 해주셨다. 단골들 덕에 생산한 족족 포장하여 택배를 발송한다. 맛을 인정받는 것 같아 은근한 자부심도 생긴다. 
 하지만 농사는 아직도 어렵다. 자연을 알 수 없고, 다양한 증세의 원인과 처방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소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사과를 정성껏 가꾸고 보살피는 것이 행복하다. 귀농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강성오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1953년생 박판식 귀농인은 2014년 월산면 신계리로 귀농했다.(연락처 : 010-9399-8757)

귀농이 꿈이었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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