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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28)

기사승인 2022.06.27  10: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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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종 칼럼위원)

사랑에 관한 두 개의 시편

  날씨가 많이 무더워졌습니다. 장마가 곧 닥치겠지요. 이럴 때 사랑에 관한 상큼한 시 두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이문재 시인의 「푸른 곰팡이」라는 시입니다.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1982년 <시운동>이라는 동인지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겠지요 
                                             -이문재, 「푸른 곰팡이」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시인 유치환이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수많은 연애편지를 써 보내던 우체국엔 행복이 흘러넘칩니다. "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풀잎 되어 젖어 있는/비애를"(「우울한 샹송」) 이수익 시인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 장소로 생각하는 우체국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비에 젖는 풀잎의 비애처럼 흐릅니다. 
  
 그런데 이문재의 우체국엔 '파시스트적 속도'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의 가속도 속에서 산책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시인은 그 산책을 ‘아름다운 산책’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렇지만 우체국에 무슨 아름다운 산책이 있겠습니까. 행복과 그리움과 사랑도 아닌 아름다운 산책이 우체국에 있다니 무슨 말입니까? 계속 읽어보니 내가 부친 편지가 그대에게 닿는 시간은 사나흘이 걸리는데 그게 "발효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 그리움과 사랑의 발효시간이라는 것일 겁니다.

더구나 내 편지는 그대에게 가는 그 사나흘동안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한다고 합니다. 이도 서로간의 신뢰와 기대로 가득 흐르는 강이란 말이겠지요. 그렇다면 산책처럼 천천히 걷는 '우편배달부의 속도'가 되레 둘의 사랑과 꿈을 푹 익히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문재가 「저물녘에 중얼거리다」라는 시에서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없어질 거야"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모두가 속도전의 질주에 휘말려 있는 시대에 ‘푸른 곰팡이’의 시간이 흐르는 우체국 사랑을 얘기하다니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인 우체국을 멀리하면서부터 사실 사랑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어찌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우체통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것도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푸르게 익혀야 할 사랑을 파시스트적 속도의 욕정으로 바꾸어버린 세대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나희덕 시인의 「숲에 관한 기억」이라는 시입니다.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하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등이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의 지분(脂粉)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정말 그 숲이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나희덕, 「숲에 관한 기억」

  사랑은 마법과 같기도 합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갑작스러움과, 논리나 통제가 무시되는 강렬함 때문에, 흔히 마법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로맨틱한 연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신비로운 확신을 주기 위해서, 전생까지도 들먹이며 둘만의 운명을 즐겨 말하거나, 하늘의 별자리까지도 둘만의 우주적 증표로 떠 있는 양 치부합니다. 그 마법의 사랑은 또 ‘순결한 관능’으로 가득 찬 마법의 숲을 꿈꾸게 하지요.

 「숲에 관한 기억」의 시에서 사랑에 빠진 시인도 순결한 관능의 열기로 좀 더 붉어진 마법의 숲에서 ‘너’를 만납니다. 

너는 사실 어떻게 온 지도 모르게 내게 왔습니다. 마치 마른 흙의 고갈을 적시는 단비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에 번지는 수많은 파문처럼, 나비 날개의 지분처럼, 그렇게 그렇게 너는 왔습니다. 그런 너와 함께 숲을 향해 나란히 걷습니다. 걷다간 꽃그늘에서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그 열기로,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은 좀 더 붉어지고, 온몸과 영혼에선 수천마리 벌들이 웅웅거리며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입맞춤입니까. 이 얼마나 열기 나는 입맞춤입니까. 아마도 ‘황홀한 소음’으로나 불러야 할 이 ‘사랑의 소음’을 경험한 사람은, 이런 최초의 입맞춤, 최초의 정열에 대한 기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는 그 키스의 황홀함으로, 온몸이 황금빛 환희의 보석으로 가득하고, 발밑에는 기화요초들이 만화방창 피어있는 것을 빼어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키스하는 두 연인이 서 있는 꽃밭언덕은 사실 절벽으로, 자칫하면 추락의 위험성을 안고 있지요. 아니나 다를까, 위 시에서도 그렇게 황홀한 키스가 이루어졌던 그 숲이 정말 있었던 것인가 하고 시인은 묻고 있습니다. 아니 시 초반부터 시가 끝날 때까지 단정을 피하는 투의 물음을 계속해대는 것은, 이 숲의 기억이 진짜 현실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한 것입니다. 설령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웅웅거리던 벌들의 황홀한 소음은 이미 사라졌고, 꽃도, 너도, 어디에 간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것입니까. 세익스피어는 『한여름밤의 꿈』에서 “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모두 상상으로 꽉 차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결과가 단명하거나 환상이라 할지라도, 도대체 누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 곧 황홀한 소음이 나는 숲 속의 키스를 마다하겠습니까.*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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