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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 담양의 역사인물(50) 담양부사를 지낸 윤양래

기사승인 2022.06.27  12: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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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 담양의 역사인물(50) 담양부사를 지낸 윤양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아버지는 경주부윤 윤이(尹理)이다.

1699년(숙종25) 진사를 거쳐, 170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주서(注書)에 초임됐다.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지평(持平)·정언 등을 역임했으며 1716년 문학·필선·헌납·집의 및 담양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720년 승지·병조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721년(경종1)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1725년(영조1) 노론의 재집권으로 승지가 되고, 이어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 재직 중 윤심형의 논척(論斥)을 받고 영월부사로 나갔다가 곧 병조참판이 되었다.

윤양래 부사는 1716년 7월에 담양부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사간에 임명돼 담양부사직을 떠났다. 

담양부사 재임기간 5개월 밖에 안 되었던 윤양래 부사에게 담양 고을민들이 청덕비를 세워준 것은 그만큼 선정을 베풀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관련된 청덕비가 무정면 동강리 강정자마을 민가에 있으며 “府使 尹侯 陽來 淸德善政碑(부사 윤후 양래 청덕선정비) 丁酉 二月 日(정유 이월 일)”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즉 “담양부사 윤 후 양래가 맑은 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1717년 2월에 새김”으로 풀이된다. 

동강리 강정자마을 윤양래 부사 청덕비는 현재 마을의 한 빈집 뒷편 대나무숲 잡초에 둘러쌓인 채 방치되고 있다. 당초 길가에 있어서 일제강점기까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으나 해방후 신작로(새길)가 개설되면서 구길이 폐도가 되고 옛길 주변에 마을 주민들의 집이 하나 둘 들어서게 돼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됐다. 

현재 대숲에 방치되고 있는 윤 부사의 청덕비는 우측으로 약간 기운 채 퇴적층에 일부분 묻힌데다 외관도 상당부분 풍화돼 육안으로 해독이 쉽지 않은 상태여서 관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 담양뉴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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