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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의 詩이야기/ 詩의 향기,삶의 황홀(37)

기사승인 2023.03.27  0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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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종 칼럼위원(시인)

복사꽃과 가난한 사람들

사방이 꽃 잔치입니다. 그 꽃과 관련한 우대식 시인의 「五里」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대식 시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고,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있고 현재 경기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지요.



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五里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五里,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五里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五里만 가면 
五里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우대식, 「五里」

  오리만 더 가면 연분홍 복사꽃 피는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냄새가 나는 성황당고개가 있고, 그곳에서 다시 오리만 더 가면 봄이 서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양지녘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무덤과, 그 무덤 위에 종다리도 햇살의 축복을 받고 앉아있는, 두메는 왜 아늑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다시 오리만 더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어머니! 오리를 더 가고, 오리를 더 가고, 자꾸 오리를 더 가야만 하는 그 끝에 간난신고 모진 세월을 다 견디고도 거기 정정하게 서 계실 어머니! 아니 거기 두메의 무덤에 이미 묻힌 채 마음의 五里에만 서 계실 어머니를 불러보는 봄날은 너무 아득하고, 너무 서럽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40여개나 되는 큰 대바구니를 이고, 눈이 한자나 쌓인 새벽에도 검정고무신에 감발을 친 채, 집에서 시오리가 넘는 오일장에 가셨습니다. 저도 바구니를 지고 새벽장을 한번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 자갈길 신작로는 어찌 길이 팍팍하고, 이리가 출몰한다는 이리목고개는 왜 그리 높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시오리길은 어찌 그리 멀기만 하든지요? 그날은 눈이 쌓인 날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처럼 고생고생을 해봐야만 어머니의 생활과 어머니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기에, 어머니에게 닿는 길은 오리를 더 가고, 오리를 더 가고, 또 오리를 더 가야만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강원도 두메산골 출신인 우대식 시인도 어릴 적 고생 경험이 있어, 어머니에게 가 닿는 길을 이렇게 멀게,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놓은 모양입니다.

  이런 봄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다룬 최승호 시인의 또 한편의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최승호 시인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고, 1977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고비』 『대설주의보』 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도 
너덜너덜한 소굴에서 살아간다 
시커먼 연기가 솟고 소방차들이 달려왔을 때 
무너지는 잿더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노파를 나는 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변두리의 인생들이 있다는 것 
헌혈 플래카드를 큼직하게 내건 
적십자혈액원 건물이 바로 옆에 있지만 
가난한 피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너절하게 
불어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 

그 누구도 物王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넝마촌과 붙어 있는 고물상, 폐품들의 무덤 
그 크기는 왕릉만 하다 
나는 그것을 古物王의 무덤이라고 불러본다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오늘도 문명의 잔해를 나르는 곳, 그 입구를 지키며 
엎드려 있는 검은 개는 
스핑크스처럼 
짖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다 
                                         -최승호, 「가난한 사람들」

  인간 소외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박탈당하여 비인간화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인간화는 사회적 제도나 정치·경제체제 등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발전과 더불어,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 대하여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데서부터 생깁니다. 이와 같은 소외 현상을, 프로이트학파에서는 문화기구에 대한 개인의 적응장애로 보고, 칼 마르크스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고도화된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병리현상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여기 최승호의 시 「가난한 사람들」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사실 서울 한복판에 변두리 인생들, 아니 가난한 사람들이 너덜너덜한 소굴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처음엔 생각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소방차가 달려왔을 때에야 거기 무너지는 잿더미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노파를 보며, 그들이 서울 한복판의 적십자 혈액원 건물 바로 옆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여기서 적십자 혈액원이란 말에서 착안하여 “가난한 피는 여전히 가난하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 말은 가난이 '피'에다 방점을 두면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 등에 기인한 것이란 프로이트적 해석을 낳을 수 있고, '여전히'라는 말에 방점을 치면 체제나 대물림 등에 기인한 것이란 마르크스적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승호는 역시 고도화된 산업사회 문명이 가져온 병리현상으로서의 가난과 소외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너절하게/ 불어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이란 표현과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오늘도 문명의 잔해를 나르는 곳"이란 표현에서 그걸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사실 불이 난 현장에서 생긴 넝마며 폐품은 고물상으로 갑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 곧 우리 모두의 문명적 삶에서 너절하게 늘어나는 것들도 고물상으로 갑니다. 누구도 그 물건의 소유주인 물왕(物王)이 되지 못한 채 고물왕의 왕릉이 되기 위해 고물상으로 가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이 문명의 잔해들을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나르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문명의 소외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 문명의 병리적 현상을 무덤 쪽으로 나르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물상 입구를 지키며 엎드려 있는 스핑크스만한 개가 짖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핑크스만큼 큰 소외를 안은 자들이 이젠 분노할 기력도 없이 다만 스핑크스만큼 큰 싸늘한 냉담으로 사람도 아닌 개가 되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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