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칼럼위원(전남도립대학교 교수)
문득 공원 화단에 흰 속살처럼 뽀얀 꽃대가 여기저기 쑥 올라와 연 분홍빛 꽃잎을 받쳐 들고 있는 상사화를 보니 드디어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신호인 듯하여 반갑기가 그지없다.
잎이 없이 꽃잎만 받쳐 들고 있는 꽃대는 막대기를 꽂아놓은 듯하다.잎과 꽃이 잠시라도 함께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을 띠고 태어난 상사화!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에 빗대어, 상사화(相思花)라고 부르며 꽃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분포되어 있는 상사화류는 상사화, 꽃무릇, 백양꽃,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제주상사화, 위도상사화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태학적, 분포지 등을 고려하여 분류하면 여러 종류가 있으나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꽃들을 통칭하여 상사화라고 부르는 추세이다.
가장 대표적인 상사화 종류에는 연분홍 꽃을 피우는 상사화와 붉은 주홍빛 꽃을 피우는 꽃무릇이 있다. 둘 다 잎과 꽃이 만날 수 없기에 상사화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차이가 있다.
상사화는 외떡잎 식물강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4월 초가 되면 마른 땅을 뚫고 연둣빛 새싹이 탐스럽게 솟아나는 상사화는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로서 상사화의 잎들은 얼핏 보면 군자란 잎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싹이 쑥쑥 자라서 푸른 잎을 보여주다가 5월을 지나 6월이 되면 잎은 시들어 말라 죽고 7월 중순이나 8월이 되면 잎이 말라죽은 자리에서 기다리던 잎은 보지 못한 채 꽃대만 홀로 솟아 나와 기다리던 그리움을 연 분홍빛 꽃잎으로 피워낸다.
상사화는 꽃무릇에 비하여 잎이 넓고 봄에 잎을 먼저 피우고 8~9월 사이에 꽃을 피우며, 꽃무릇의 꽃 수술은 꽃잎 밖으로 많이 나와 있는 반면에 상사화의 꽃 수술은 꽃무릇에 비하여 꽃 수술의 수도 적을 뿐 아니라 주로 꽃잎 안쪽으로 나와 있다.
꽃무릇은 가을에 꽃대가 먼저 올라와 9월 초에서 10월 사이에 짙은 주홍색 꽃을 피운 뒤, 꽃이 지면 새잎이 돋아나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난 뒤에 다음 해 4월경에 잎이 사라진다. 꽃무릇의 잎은 상사화에 비해 좁고 가는 편이다.
즉,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고 나중에 꽃을 피우지만, 꽃무릇은 꽃을 먼저 피우고 잎이 나중이 나온다는 차이점이 있다. 꽃무릇의 꽃말도 서로 만날 수 없기에 ‘슬픈 사랑’이라고 한다. 상사화 꽃줄기의 높이는 보통 50~70cm 정도로 꽃줄기 높이가 30~50cm인 꽃무릇에 비하여 키가 약간 더 큰 편이다.
꽃무릇은 석산이라고도 하는데 석산(石蒜)은 글자가 의미하는 대로 '돌마늘'이라는 뜻이다. 꽃무릇의 뿌리 부분인 인경이 마늘과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고 꽃무릇은 '꽃이 무리지어 난다'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꽃무릇은 주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사찰 부근에 많이 심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절 주위에서 꽃무릇을 많이 키우는 이유는 꽃무릇 뿌리 부분에는 천연방부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탱화를 그리거나 사찰의 단청을 칠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꽃무릇이 유명한 사찰로는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매년 9월 중순 무렵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 죽도록 보고 싶은데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운명이라면, 그것도 해와 달이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평생 함께할 수 없는 관계라면 얼마나 그리움이 애틋할까.기러기 날자 제비 돌아온다는 ‘연안대비(燕雁代飛)’라는 말이 있다.
제비는 기러기가 시베리아로 떠난 다음 해 봄에 돌아오고 기러기는 제비가 강남으로 떠난 후 겨울에 방문하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명처럼 겪어야 하는 일 들이 있다.그러나 상사화의 꽃과 잎, 밤과 낮, 해와 달, 모두가 서로 동시에 만나지는 못하는 운명이지만 이러한 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상사화가 되고 하루가 되고 한 달, 한 해가 되는 것이다.
불볕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더위 속에 밤낮으로 가을 기운이 살포시 스며드는 9월을 맞이하여 만날 수 있는 친구, 연인 또는 가족끼리 10월이 가기 전에 근처 꽃무릇 군락지에 다녀와 보자. 만나지 못할 운명이 만남으로 바뀌길 기도하며~~!
( ※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장광호 편집국장 dn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