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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뉴스 지역밀착형 기사/귀농일기(18)

기사승인 2020.11.16  10: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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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인 고을석 님의 “딸기를 벗 삼아”

귀농인 고 을 석 님

귀농하기 전부터 매월 한 번 이상은 고향을 찾았다.
어머니가 살고 계셔서 어머니를 볼 겸 귀농을 준비하려고 틈틈이 고향에 내려온 것이었다.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농사짓는 분들을 자주 접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작목은 딸기였다. 어려서부터 딸기에 익숙했고, 지인들이 딸기 농사를 짓는 분이 많아 자연스럽게 딸기를 먼저 생각했다. 어떤 날은 선배님 농장을 찾아가 딸기를 배웠고, 어떤 날은 친구 농장을 찾아가 일손을 거들며 딸기 농사를 체험했다.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틈틈이 내려와 배우다보니 기술 습득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약 3년여를 그렇게 배우러 다녔다. 재배 기술에 자신감을 가진 건 아니지만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앞뒤 가리지 않고 귀농했다.

나는 귀농하기 전에는 당구장을 운영했다. 서울 용산 쪽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귀농한 것처럼 당구장도 앞뒤 가리지 않고 시작했다. 물론 생계 때문이었다. 당구장을 시작할 때 구력이 짧아 겨우 80을 쳤다. 큐대만 잡으면 30이고, 조금 치면 50이고, 그 다음이 80, 100, 150, 200, 300, 400, 500, 1000, 2000, 3000… 순이다.
한글 배우는 과정에 비교한다면 80은 기역, 니은, 디귿을 떼고, 가나다라를 떼고, 엄마, 아빠와 같은 기본적인 단어를 읽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당구장을 하려면 혼자 당구장에 들른 손님을 상대해 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손님이 긴장감을 느낄 수준이 되어야 손님도 즐거울 것이다. 적어도 200정도는 쳐야 손님을 상대할 수 있고, 손님도 긴장을 느끼며 게임에 임할 텐데, 너무 낮은 실력으로 무턱대고 당구장을 시작한 것이다. 당구 게임이 다양한데, 나는 4구밖에 몰랐다. 스리쿠션, 식스볼, 라인볼, 포켓볼 등의 게임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당구장을 시작한 것이다.

당구장 주인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은 영업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나는 이를  극복하려고 본격적으로 당구를 배웠다. 한국당구아카데미에 수강 신청을 하여 고3 학생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집중력을 발휘해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하다 보니 6개월 만에 300점 수준에 도달했다. 300이면 어떤 손님을 상대해도 재미있는 게임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 그 이상은 배우지 않았다. 내가 실력이 늘자, 나에게 당구를 가르쳐달라는 손님도 있었다. 나는 배운 것을 토대로 정성껏 지도했다. 그분의 실력이 단기간에 향상되는 걸 보고 보람도 있었다. 단골도 제법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당구장이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링 붐이 일 때부터일 것이다.
그 후 PC방이 등장했다. 청소년들은 당구장보다 PC방을 선호했다. 당구보다 게임을 선호하는 청소년이 9할이라면 당구장을 선호하는 층은 1할에 불과했다. 갈수록 당구 인구가 줄어들 거라는 예상이 어렵지 않게 들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니 젊은 사장들의 과감한 투자나 역동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을 고민해야 했다. 직장을 잡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나이가 있으니 무리하게 투자할 수 없었다. 실패라도 한다면 일어서기 버겁기 때문이었다. 투자 않고 할 만한 것을 알아보았다. 극히 제한적이었다. 배달이 가장 먼저 후보군에 올려졌다. 배달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배달을 하더라도 몇 년 못 갈 것 같았다. 나이가 있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일 할 수 있고, 가족 생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다가 귀농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매달 고향을 찾았고, 어느 정도 딸기를 알게 되자 13년 간 운영했던 당구장을 접고 귀농했다.

귀농해서 번듯하게 지은 집

귀농 조건은 좋았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은 덕에 농지도 있고, 기반도 다져져 있고, 거주할 집도 있으니 홀가분했다. 게다가 미리 딸기에 대해 공부를 했으니 투자와 소득을 예상할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을 설계할 수 있었다. 딸기를 재배하다 모르면 지인들이나 이웃에게 물을 수 있다는 점이 귀농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집도 번듯하게 지었다.
그런데 가족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규모를 늘려 외국인과 농사를 지으려던 꿈도 요즘은 휘청거린다.

코로나 19 여파로 외국인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게 되었다. 봉산처럼 딸기를 집중적으로, 꾸준히, 대량으로 해오던 농가와 다르게 내 주위 분들은 가족끼리 농사를 짓는 경우가 태반이라 정보 구하기도 어렵다. 고설재배라 노동 조건이 좋은 데도 내가 정보를 모르니 외국인 구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건 어떻게든 극복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이다. 올해로 귀농 4년째인데,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농사였다.

아직도 기술 수준이 바닥에 머물러 있다. 당구로 치면 한 80이나 될까? 짧은 기간에 당구 실력을 늘렸듯, 가급적 짧은 시간에 기술 수준을 높이려고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갠다. 대학교 선배님이기도 하고, 농협에서 컨설팅을 해 주신 딸기 전문가를 수시로 찾아뵙는다. 자문을 구하고, 답을 듣는다. 덕분에 딸기 재배에 관한 한 이론적으로는 상당히 업그레이드되었다. 당구와 비교한다면 300은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무장했으니, 현장에서 적용하고, 응용하고, 발전시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나보다 기술이 떨어진 분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저 멀리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다./강성오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1967년생 고을석 귀농인은 2016년 월산면으로 귀농했다
  (연락처 010-5428-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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