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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1/담양이야기(18)2천만원의 노다지

기사승인 2020.11.24  1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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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이야기(18)2천만원의 노다지
일제 강점기 때 묻어둔 비행기 폭탄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요새로 알려진 대전면 서옥리 환인마을 뒷산 두봉산에 고철 값으로 시가 2천만원 상당의 비행기 폭탄이 매몰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은 1965년 8월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군 당국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국고수익이 되어야 할 동굴 속의 폭탄을 둘러싸고 중앙의 권력기관을 동원해 이권 투쟁을 벌이고 있던 고철상인들의 등쌀에 관할 당국의 조치가 늦어지자 인근 주민들은 “폭탄이 터질까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조속한 대책을 호소하기도 했다. 

담양경찰서장의 경고판과 특별순찰함까지 설치돼 있던 두봉산 중턱에는 높이 2m5cm, 넓이 약 2m, 깊이 60m 가량의 굴 5개에 비행기 폭탄이 가득 차 있었다는데, 이 굴은 해방직전 1945년 2월경 근로봉사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노무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매일 300명 가량의 노무자들이 동원되어 굴 파는 작업을 완료하고 폭탄을 저장한 다음에 고사포 진지를 설치하는 도중에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비장된 폭탄의 정확한 수량은 확인할 수 없으나 굴의 규모로 보아 고철상인들은 약 2천만원어치의 고철(탄피, 폭탄)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권쟁탈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 후 1966년에 고철상인과 상이군인회 등에서 발굴권을 따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한국화약에 낙찰되어 1966년 4월 1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그런데 4월 15일에 12대째 내려온다는 강씨 문중에서 동의 없이 산을 허물 수 없다는 항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육군 561탄약처리반이 현지에 투입되어 경비를 맡았고 폭탄 발굴작업은 약 2개월간 진행되었는데 폭탄에 뇌관장치가 되어있지 않아서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발굴 수개월째인 1967년 4월 14일 폭탄의 모습이 드러났다. 250kg 짜리 3개, 50kg 짜리 13개, 15kg 짜리 2개 등이 발굴됐는데, 폭탄은 21년 전 그대로 상자에 포장되어 있었다. 다량의 폭탄이 나오자 주민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하지만, 발굴작업이 확대되자 산주의 항소로 발굴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법정 싸움이 장기화되자 주민들은 폭탄발굴 작업으로 인한 공포 분위기를 빨리 해결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산주의 항소로 벌어진 소송은 10개월이 지나도록 출입금지 가처분이 내려짐으로써 장기화됐다.
발굴이 중단된 작업현장에는 폭탄이 방치돼 있어 주민들의 불안은 더욱 높아만 갔다. 주민들의 끝없는 탄원과 군 당국의 협조로 1년 만에 발굴작업이 다시 시작돼 활기를 되찾는 분위기였으나 이후로는 단 한 개의 폭탄도 발굴되지 않아 실망이 컸다. 이에따라 발굴허가를 받은 한국화약은 막대한 비용만 낭비하고 현장을 떠나고 말았다./담양뉴스
(출처 : 이해섭의 ‘담양이야기’ 387∼388쪽)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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