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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추억 고스란히 창평면 '창평시장'

기사승인 2020.12.24  11: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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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뚤레뚤레 동네한바퀴(23)

담양뉴스는 지역사회와 더욱 가깝고 밀착된 마을뉴스, 동네뉴스, 골목뉴스 서비스 제공을 위해 ‘뚤레뚤레 동네한바퀴’ 코너를 신설하고 마을의 자랑거리와 소식,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소개합니다. 참여를 희망하는 마을은 우선적으로 취재, 소개해 드립니다.(취재문의 : 담양뉴스 381-8338)/편집자 주

▲창평시장 사람들
▲창평시장

창평시장은 국밥 먹으러 다닌 것이 처음 방문하게 된 이유다. 
아마도 학교 다닐 때 나이가 좀 있으신 선배님들이 가자고 해서였거나 결혼하고 남편이 가자고 했던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와 비슷한 사유로 방문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방문하면 마약처럼 문득문득 생각나서 오게 되는 곳이 바로 창평시장일 것이다.
지금은 대형마트들이 있어서 순수하게 예전 시장의 기능만 놓고 이전과 비교해서 본다면 많이 축소되었지만, 국밥 팬층은 꾸준하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창평초등학교가 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국운이 기울어지자 당시 황실비서 승지의 관직에 있던 창평고씨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지금의 창평면 삼천리에 내려왔다.
망국의 한을 영재교육으로 달래기 위해 창평 근대교육의 효시가 된 ‘영학숙(英學塾)’ 이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했다.(영학숙은 후에 ‘창흥의숙’으로 명칭이 바뀌며 현재의 창평초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그의 신념은 ‘일본인을 미워하기 전에 나는 우리 민족을 사랑한다.’였고, ‘우리 민족도 개화가 되어야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1906년 교실 한 칸을 마련해 10여 명의 학생을 모아놓고 과목의 절반 이상을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로 편성해 가르쳤다. 이렇게 건립되어 현재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창평초등학교는 현재 학생과 교직원을 합해 100명이 넘는 규모이다. 

창평초교를 지나 시장 쪽으로 가면서 오른쪽에 ‘소통’이란 공간이 있는데 카페·문화공간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들어갔다. 
“무엇 하는 곳인가요?” 
“제가(가수 박강수 님) 여태껏 가수로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문화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이곳에서 지역 환원을 하기 위해 열었어요. 지금은 코로나로 멀티샵 형태로 운영중이예요.” 멋진 생각을 가진 분을 여기서 뵙다니 기분이 좋았다.

좀 더 가니 ‘창평 이발관’이 옛 모습을 유지한 채 영업을 하고 있었다. 
75세이신 박경자 사장님은 무정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서 50년 넘게 이발소 일을 하고 계신다. 함께 가게를 운영했던 남편이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자식을 키워내시느라 농사와 이발관을 같이 운영했었다. 담양군의 장한 어머니상도 받으셨다.
조금 더 지나가니 우연히 먹어보고 알게 된 음식 잘하시는 ‘엄마 손 맛집’ 식당이 있다. 
미리  예약하면 메뉴에 없는 요리도 부탁할 수 있을 만큼 마음 푸근하신 분이다.

누가 더 예쁜가요-임수정님

마침 영하로 내려간 추운 날이라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풍성하게 진열해놓은 노란 한라봉과 함께 빨간 모자, 빨간 마스크를 쓰신 여성(임수정 님)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예쁘시네요. 여기서 일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아니요 6개월 됐어요. 광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다가 혼자 가게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정리하고 여기 와서 일해요.” 
말도 인상도 부드럽고 물어보는 것에 대한 설명도 꼼꼼하게 해준다. 말투가 약간 투박한 고객에게도 웃으면서 응대하는 것을 보니 고수다. 멋져 보였다.
머리 자를 때가 돼서 미용실에 들렀다. 
사장님(김도윤 님)이 편하게 대해주신다. 1년에 2~3번 밖에 미용실을 가지 않고 특별히 정해놓고 가는 곳이 없지만, 오늘처럼 추운 날에 위로받기 안성맞춤으로 따사로움을 풍기는 장소다. 부산에서 15년 살다가 믿고 의지했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 친정 부모님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부모님 곁으로 왔다. 이제는 이전보다 더 소박하고 더 비우는 법을 배우게 되어 한적한 이곳에서 힐링하면서 산다.

▲곡물가게 김동희 총각

나는 시장이 좋다. 5일 장인 이곳에 나오면 대목을 보듯 넉넉하게 사서 저장한다. 값도 싸고 신선하다. 대형마트의 냉장 채소가 아니라 당일 생산한 것이라서 좋다. 잡곡은 꼭 창평시장에 와서 사는데 이번에는 곡물장사하고 있는 남성(김동희 님) 한 분께 “어떻게 장사하시게 되셨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긴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광주에 살지만 엄마가 무정면 출신이라 이곳은 많이 익숙해 있죠.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취직이 안 됐어요. 좌절해서 술을 마셨죠. 4~5년 하니 폐인이 거의 다 되었어요. 그때 부모님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이곳에서 곡물 장수를 하게 되었는데, 장터에서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 중에 나보다 힘든 사람을 많이 보면서 느꼈죠. 세상에 나보다 힘든 환경에서 사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나만 날지 못한다고...’ ‘누군가 나의 날개를 활짝 펴주지 않는다고...’만 탓했던 나를 보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실패한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배웁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봐도 ‘아! 그 사람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었겠지.’ 라고 생각하니 좌절과 분노가 안 생겨요. 장사는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만 사람 보는 눈이 생기니 사람을 보고 투자(다급할 때 손을 내미는 도움)하게 되었죠. 잘 되면 갚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가 하시는 것처럼 믿음이 가는 사람인 경우 1~2년도 기다립니다.” 

 “젊으시지만 세상 물정을 많이 경험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어요?”라고 또 묻자 “시골 마을에 곡물 사러 가서 보면 안쓰러운 부모님들을 보게 되죠.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놓고 재산 다 팔아가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요. 부모님들! 재산 자식에게 주지 말고 끝까지 갖고 계셔야 해요. 당신들이 만든 재산이니까요.”라고 했다. 
옆에 있던 시장분들이 “신문에 광고 좀 하세요. 맘씨 고운 아가씨 있으면 창평시장 김동희 사장님에게 오라고요...”
하면서 당부하신다. 
“어머니, 아드님 어때요? 자랑 좀 해주세요.” 
“자랑할 것도 없어요.” 
“정말요?” 
“말은 잘 들어.” 
주변 분들에게 아까전 그 총각에 대해 여쭙자 “속아지 좋고 장사 잘하고 술 안 마시고 일등 신랑감이요,”라고 하신다.

이 총각에게 인생에 대한 강의를 잘 들었다. 감사하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고 나니  창평시장이 훨씬 더 친근감이 들었다. 그저 물건 사는 시장이라는 객관적인 대상에서 이제는 마음으로도 느끼는 곳이 되었다. 더 자주 오고 싶다./ 양홍숙 군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소통-멀티샵 운영중
▲창평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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