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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처가마을 창평면 해곡리

기사승인 2021.01.08  16: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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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뚤레뚤레 동네한바퀴(24)

마을의 다문화 가족

매서운 추위를 뚫고 해곡리로 달려간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나를 빙빙 돌리고야 말았다. 지도를 보지 않고 감으로 잡아도 먼 거리가 아닌데 큰 도로로 안내해서 20킬로 넘는 길을 달리게 만들더니 도로 한가운데 나를 세웠다. 다시 70킬로를 돌고 돌아 해곡리에 도착했다. 
그렇게 어렵게 간 해곡리 마을은 조용하고 깨끗하게 단장 되어 있었다. 
역시 문화유씨의 종가가 있는 마을은 다르구나, 라고 느끼게 했다. 왕복 2차선이 마을 앞에 나 있고 마을 앞에는 창평천이 흐르며 멀리 무등산이 훤하게 보였다. 뒤로는 산자락이 자리하고 있어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경제력을 갖고 있던 양반들이 살았던 곳인 듯하다. 
원래 마을에 사액서원인 ‘송강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유종헌 가옥은 송강 정철 선생의 처가였던 곳으로 이곳에서 혼례를 치렀다. 조선시대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정철의 4남)이 1647년에 중수상량문에 쓴 글에 의하면 16세기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조선 중기 상류층 주택 구조를 갖고 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당에는 200년 넘은 매화가 있고 지금은 문화재로 승격되어 종가 주변이 잘 관리되고 있다. 

유영록 이장님의 마을 안내가 끝나고 홀로 골목길을 걷다가 한 여성분이 자전거 타고 지나가길래 인사를 했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는 주민분에게 이곳에 살기가 어떤지 여쭙자 대답이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10년 넘게 이주민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바로 이주민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저는 이 마을에 대한 글을 쓰러 왔어요.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캄보디아요.” 
“줌립쑤어” 라고 인사를 건네자 나에게 “캄보디아 사람이예요?” 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데 이분이 추워하는 것이 보여서 미안하지만 집으로 가서 얘기할 시간이 좀 있는지 물었다. 승낙해 주어서 함께 그분 집에 갔다. 집에 친구 두 명이 더 있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내가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오는 표정이 밝지 않길래, 바로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캄보디아 친구를 전화로 연결해주면서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주라고 부탁했다. 
긴 시간 통화하던 중에 이주민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왔다(박영구 님). 사장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는지 묻자 흔쾌히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라고 한다. 

해곡마을 전경

박영구 사장님은 35년간 농사를 짓고 있으며 지금 15년째 딸기 농사를 하시는 고수 중에 고수 농부이시다.
올해 장마로 비닐하우스 안의 물이 가슴높이까지 차서 이제 농사를 그만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 세 분의 근로자들이 빗 속에서 복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다시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먹은 계기였다. 
안에 두 친구가 더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주근로자 친구들은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아 주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는지 묻자, 급할 때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통역사를 부른다고 한다. 10년 넘게 이주근로자들과 함께 하시니 눈치로도 소통이 될 듯하다.
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두 명의 근로자들은 현재 한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으며, 매달 안부 전화나 명절에 시댁 들리는 길에 이곳까지 오는 부모 자식 사이 같은 관계가 되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는 근로자들 옷도 손수 빨아주고 쉬는 시간에는 함께 누워 텔레비전도 보곤했다. 지금 역시 사장님과 이주근로자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따뜻해 보였다.

사장님께 물었다. 
“요즘 컨테이너박스에서 거주하게 해서 사고가 났고, 그것이 뉴스에 보도되었는데 사장님은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시는 게 어떠세요?” 
“이분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죠. 이 친구들은 더운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7도에서도 동상에 걸리기도 하거든요. 이 집이 옛날 집이라서 난방이 잘 안 되어서 창문을 2중창으로 바꿨어요. 가끔 창평과 고서에 사는 근로자 친구들이 와서 우리 집에서 놀면 제가 자리를 피해 주기도 해요. 벚꽃축제, 대나무 축제, 장미축제, 여름 해변 등에 데리고 가기도 해요. 한 번은 농사가 잘 되서 보상으로 제주도 3일 여행도 함께 했어요. 우리가 사는 것과 같이 보고 느끼면서 사는 거죠.
지금 농촌은 이주근로자들이 없으면 농사를 못 지어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분들이죠. 마을에도 이제 80 넘으신 분만 몇 분 계시고 일할만 한 사람이 없어요.”

이날 저녁 나는 사장님 댁에서 생선찜 요리와 잡채 그리고 춘권 튀김 같은 캄보디아 요리가 너무 맛있어 포식하는 영광도 얻었다. 너무 맛있어서 지금도 그 맛과 이주민에 대한 사장님 가족의 풋풋한 인정이 생각난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다. 딸기농장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들르고 싶다./양홍숙 군민기자

마을회관
마을에서 바로 본 무등산
250년 된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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