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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담양의 인물(22)청계 김응회

기사승인 2021.01.25  09: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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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역사인물 (22)청계 김응회(1555~1597)

김응회 지려각(담양읍 학동리 소재)
청계 김응회

 

언양김씨(彦陽金氏) 김응회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시극(時極)이며 호는 청계(淸溪)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성벽(金成璧)이며 담양부 향백동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지금의 금성면 외추리 매곡(어매곡)으로 이거해 살았다. 어려서부터 남의 뒤따르기를 싫어하고 언제나 마을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등 기개가 넘쳐 세간의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응회는 자라면서 무예에도 출중하고 신의가 두터워 불의는 용납하지 않았고,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수은 강항(姜沆), 우산 안방준(安邦俊)과 교유했다. 1585년(선조18) 을유식년 사마시 과거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귀후서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처남인 김덕령 부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반역죄로 연루되었을 때 김응회도 함께 붙잡혔는데,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처남 김덕령의 충성스러움을 주장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김상이 옥사를 다스리는 책임자였는데 청계에게 김덕령이 반역한 사실을 소상이 알리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청계는 반역은 커녕 나라를 위해 김덕령의 혁혁한 공을 극구 찬양하였다. 이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하였는데도 태연자약하므로 이를 본 김상이 “그렇게 혹독한 매를 맞고도 어찌하여 고통의 빛마저 나타내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김응회는 “곤장을 맞아 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느냐. 다만 가까이에 임금님이 계시니 이 천한 신하의 신음소리를 임금님 귀에까지 들리게 하여 더럽힐까 그러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는 심문을 다시 시작하려하자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움직이지 못하는 두 다리를 두 손으로 끌어다가 무릎을 꿰고 단정히 앉아 심문에 응하려고 한다. 

김상이 그 모습을 보고는 감탄하며 “만일 이 사람을 죽게 하면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참다운 의사로다.”하고는 그 자리에서 임금께 김응회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장계를 올리니 청계의 모든 언행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임금은 즉석에서 이를 석방하라고 명함으로써 풀려나오게 되었다. 

옥에서 나온 후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산(坡山)에서 석고대죄하고 있던 성혼(成渾)에게 글을 올려 문안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했다. 이때 어머니와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도 함께 순절하였다. 김응회의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며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처남이다./ 담양뉴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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