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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알기3/담양의 역사인물(37)박이관·박이홍 형제

기사승인 2021.11.09  12: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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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역사인물(37)/박이관·박이홍 형제

충효문

담양부사 兄 박이관 

보옹 박이관(朴以寬)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부친은 박수화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492년(성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직으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 외직으로 담양부사·홍주목사를 역임했다. 
천성이 인자하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고을을 다스리는데 덕(德)으로써 몸소 실천에 옮겼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많은 선비가 화를 입은 뒤로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몸을 감추었고 그의 아우인 박이홍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명하며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양친의 상을 당하매 여막을 짓고 시묘했다. 담양 창평의 유곡사(維谷祠)에 동생 이홍과 함께 배양했다. 

홍문관 정학 동생 박이홍

월영당(月影堂) 박이홍(朴以洪)은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조광조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학행과 효성이 드러나 천거했다. 학문을 좋아했고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스승으로 섬겼다. 천성이 정직하고 학식이 뛰어나 정묘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남상별(南床別)에 천거되었고 청백리로 홍문관 교리 ,전경 등을 역임했다. 
간사하고 국정을 어지럽히는 배정배(裵貞裵)를 물리치고 상소(上疏)하였는 바. 오히려 모함으로 갑술년에 파직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가 귀양을 가자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별저(別邸)를 세우고 이를 월영당(月影堂)이라 이름하여 형(兄) 박이관과 더불어 도학을 강명하며 지냈다.
한편, 창평 유곡 절산마을은 함양박씨 박이관·박이홍 형제의 집성촌으로 박이홍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왔으나 후일 문화유씨와 기타 몇몇 씨족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충효문(忠孝門)은 월영공 박이홍의 손자 군자감 장경과 장사랑 인경의 행적으로 임진난시의 업적을 가려 숙종23년(1684)에 왕명으로 정려각(건축기념물)이 세워졌으며 열녀 두 분과 같이 광업, 계업 형제의 효행과 함께 충효문으로 명명되어 보존되고 있다.

담양뉴스 webmaster@dnnews.co.kr

<저작권자 © 담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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